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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 요시미츠의 연보 ‘같은 것’

1950

1953

1956

1월 25일 도쿄 시부야 마루야마쵸에서 태어난다.
부모님이 요리집을 운영하셨기에 소년 모리타에게 게이샤들은 매우 친근한 존재였다.
손님들을 보며 어린 나이임에도 인간의 양면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연극을 좋아하는 할머니에게 이끌려 가부키나 신국극 등 일본 전통극을 보러 다녔다.

 

할머니는 도박도 좋아해 시부야 나미키바시에 있는 마권장외발매소에 모리타를 데리고 다녔다.나중에 모리타가 ‘경마광’이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일지도 모른다.

모리타는 “제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집안 환경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회상한다.

 

돌보아주는 분과 매일 집 근처 신센역에 전철을 보러 다닌다.

시부야 구립 오무코 소학교에 입학.

(1997년 통폐합되어 현재 옛 부지에는 도큐백화점 본점인 시어터 고쿤이 들어섰다)

1957

1960

1962

1963

1966

1968

1972

​〜

도호 예능 학교에 다닌다.

TV드라마 <나가야의 제군!>

(닷센 트리오 주연의 코미디)에 아역으로 출연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쓰바키 산주로>에 감탄하여 처음으로 영화감독의 이름을

기억한다.

시부야 구립 쇼토 중학교에 입학한다.

일본대학 부설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부에서 영화평을 담당.

<닥터 지바고>의 스케일에 감동하여 영화의 매력에 눈뜬다.

재즈에 열중하게 된 것도 이 시기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방송학과에 입학하나 학원분쟁으로 대학은 폐쇄되고 수업이

없어진다.

방송 관계의 설비도 이용할 수 없었다.

8mm 영화를 찍기 시작하며 자주영화 상영회에서 발표한다.

8mm 영화 <영화>(1971), <날씨예보>(1971), <원근술>(1972) 등이 주목을 받는다.

오야 소이치의 도쿄 매스컴 학원에 다닌다.

1972

1978

​〜

1976

1978

1980

1981

구직 활동도 하지 않은 채 대학을 졸업한다. 구보타 광고 연구소에 다닌다.

도쿄 이다바시에 있는 영화관 긴레이 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8mm 영화를 계속 찍는다.

<수증기급행>(1976) 등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이 탄생했다.

일과 삶에 있어 평생의 동반자가 될 미사와 가즈코와 결혼.

8mm 영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라이브 인 치가사키>를 발표한다.

서핑의 성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치가사키시(市)에 사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자주영화계에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주목을 받아 8mm에서 35mm로 도약하는 큰 계기가 된다.

모리타는 이 영화에 대해 “사람이 죽지 않는 청춘영화가 있어도 좋잖아요. 청춘이란 좀 더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미사와 가즈코와 영화사무소 ‘뉴즈(N・E・W・S) 코포레이션’을 설립한다.

 

 

9월 12일 <노 요우나모노>(~와 같은 것이라는 뜻) 개봉.

모리타가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썼으며 제작비를 조달하였다.

배우와의 출연 협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정식 사무소를 개설했으며 배급만 전문 회사에 위탁하는 방식이었다.

신인감독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출발이었다.

모리타는 “처음에 무엇을 만들면 좋을지 생각했을 때, 풍속점과 만담(라쿠고)이 떠올랐다.

이 두 가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정형화된 인간 관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 ~적인 것, 오히려,

그런 것에 진짜가 있지 않을까”라고 서술한다.

영화 안팎으로 파격적이었던 이 작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단관 개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흥행한다.

이후, 요코하마영화제 작품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모리타가 등장했을 때만큼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없다 고 회자된다.

‘인간이란 얼마나 재미있는지’라는 이 영화의 광고 문구야말로 모리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1982

데뷔작을 통해 단번에 주목을 받았지만, 해가 지난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음 영화의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인기 아이돌 그룹 ‘시부가키대’를 주연으로 한 영화 <시부가키대 보이즈&걸즈>(7월 21일 개봉)가 그것이다.

아이돌을 보러 오는 팬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12일간 로케이션 촬영으로 이루어졌다.

거의 동시에 닛카츠 로만포르노 <소문의 스트리퍼>의 제작이 정해지고

<가족 게임>의 제안까지 받는다.

결과적으로 한 달간 3편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쓰는 기염을 토한다.

10월 1일 <소문의 스트리퍼> 개봉. 흥행은 아쉬웠지만 제작사 중역들의 호평을 받는다.

이로 인해 다음 해 1월에 두 번째 로만포르노 <사랑의 이발소>를 찍게 된다.

1983

1월 21일 <사랑의 이발소> 개봉.

모리타는 “로만포르노에서는 과감한 연출을 할 수 있었다. 젊은 감독으로서 경험의 장이 되었고 정말 감사했다”고 말한다.

개봉 이틀 후 <가족 게임> 크랭크인. 촬영 기간은 18일.

모리타는 “조감독 경험이 없는 미숙함을 전작 3편을 통해 상당히 극복할 수 있었다.

만약 <노 요우나모노> 이후 바로 이 작품을 했다면 이 정도의 영화는 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6월 4일 <가족 게임> 개봉.

이 작품은 일본 국내 영화상을 휩쓸고,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 공식 출품된다.뉴욕을 비롯한 미국 각지에서 개봉된다.

8월 1일 <도키메키니 시스> 크랭크인.

이 제안이 왔을 때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은 있었지만 흥행은 어렵다고 여겨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연이 사와다 겐지라는 걸 알고 우리 세대 청춘의 상징이었던 쥬리(사와다 겐지의 별칭)를 연출할 수 있다”며 수락한다.

1984

2월 18일 <도키메키니 시스> 개봉.

(아쉽게도)예상한대로 흥행은 실패했지만, 모리타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영화다.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로케이션, 인간 관계, 대사 표현, 카메라 워크, 색감, 음악, 분위기 모두

매우 좋았다”고 언급한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모리타 작품 중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도키메키니 시스> 개봉 직후, <메인 테마> 크랭크인.

<메인 테마>의 오키나와 촬영은 유독 날씨가 좋지 않았다. 모리타 팀의 악천후 운은 여기서 모두 사용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에 신비한 환상성을 부여한다.모리타는 촬영에 있어 불리한 상황도 유리하게 이용한다.  

4월에 ‘그림이 없는 영화’라는 컨셉으로 <괜찮아>, <왜냐면>, <그런>이라는 LP 음반 3부작을 발표한다.

일본영화에서 구현하기 힘든 큰 스케일도 ‘소리’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모리타 특유의 유희 감각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영화다.

7월 14일 <메인 테마> 개봉.

그해 여름방학 시즌 메가 히트작이 되어 가도카와라는 브랜드를 갖게 된 모리타는 다시 한

번 메이저 감독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결정하기까지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느 날, 제작사 선댄스 컴퍼니의 후루사와 도시오가 “내년 가을에 시부야 판테온, 신주쿠 밀라노, 센트럴(당시 영화관 최대 체인)을 비우게 되었으니 ‘모리타 요시미츠&마츠다 유사쿠 콤비’로 오리지널 작품을 생각해 달라”고 제안한다.

모리타는 ‘핵 대피소를 파는 세일즈맨 이야기’를 후루사와와 마츠다 유사쿠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세 사람이 선댄스 컴퍼니 사무소에서 의논하던 중 모리타와 마츠다 유사쿠가 충돌한 것이다.

유사쿠: 밖으로 나와!

모리타: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까) 권총으로 쏴 죽여 주겠어!

후루사와: 여긴 내 사무실이야. 할 거면 밖에서 해.

터무니없는 말에 결국 유사쿠가 실소를 터트려 상황은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85

모리타는 노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를 영화화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츠다 유사쿠와 프로듀서인 구로사와 미쓰루가 ‘지금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격려하여 35세에 영화 <소레카라(그 후)>를 찍는다.

‘소세키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 실망하지 않을 영화’, ‘소세키를 읽은 독후감을,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낄 수 있는 그런 영화’, ‘메이지를 낡은 시대로 보지 않는, 포스트모던한 영화’를 목표로 삼았다.

4월 11일 <소레카라> 크랭크인.

11월 9일 <소레카라> 개봉.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며 그해의 각 영화상을 석권한다.

9월 첫 에세이집 『도쿄감독』 출판.

11월 키네마순보사에서 비평 및 대담집 『추억의 모리타 요시미츠』 간행.

1986

1987

순수한 일본적 정념을 그린 <소레카라>에서 모리타의 다음 작품은 초현실적이고

난센스하며 독특한 리듬감이 넘치는 코미디 영화 <소로반주쿠>다.

모리타는 <소레카라>를 통해 ‘젊은 거장’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런 타이틀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하기까지 했는데 영화 관계자들에게 ‘유행감독선언’을 쓴

연하장을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5월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소레카라> 출품.

8월 23일 <소로반주쿠> 개봉.

화제를 모으는데는 성공했지만 당시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는 생소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목받는 작품이 되고 있다.

같은 촬영소에서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이 모리타 각본의 코미디 가족영화

<우홋호 탐험대>를 촬영한다. 10월 18일 <우홋호 탐험대> 개봉.

4월 인생 고민 해결서 『곤란할 때 사다리타기』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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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순수 문학에서 난센스 코미디로 과감히 도전한 후, 뒤이은 작품은 야쿠자들의 다툼에 휘말리 는 두 청년을 그린 <슬픈 색이군>을 연출한다.

‘리얼리티만 추구하면 인간을 연출 할 수 없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도쿄 토박이 모리타’가 ‘근미래의 오사카’로 여겨지는 세계를 구축한다.

12월 10일 <슬픈 색이군> 개봉.

10월에는 각본과 총지휘를 맡은 옴니버스 영화 <바카야로! 저, 화났어요> 개봉.

모리타는 “제가 직접 감독을 해도 좋지만 다양성을 갖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TV나 연극, 광고 등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이 영화감독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다른 분야의 젊은 인재들에게 한 편씩 연출을 맡긴다. 이 영화는 큰 인기를 끌며 시리즈화 된다. 현재(2022년), 영화계 출신이 아닌 영화감독은 흔한 일이 되었으며 이에 모리타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1989

<바카야로! 2 행복해지고 싶어>의 동시상영작으로 <사랑과 헤이세이의 플레이보이>를 찍는다.

“음반의 B면이라는 발상으로 가볍게 찍어야 하는 영화를 최선을 다해 가볍게 찍었다”는 가작(佳作).


7월 8일 <사랑과 헤이세이의 플레이보이> 개봉.


7월 31일 <키친> 크랭크인.요시모토 바나나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자신이 각본화 할 수 있는 소재라고 직감하여” 연출 제안을 받아들인다.

전작 <사랑과 헤이세이의 플레이보이>가 ‘버블 경제 분위기’가 가득한

영화였다면 <키친>은 앞으로 다가올 젊은이(인간)들의 고독감, 소통의 어려움,

삶의 고단함, 답답함 등 ‘포스트 버블’ 시대의 감각을 예견한 점이 모리타

영화답다.

10월 28일 <키친> 개봉.

NTT의 연간 TV광고 <백 년째 전화 생활>시리즈 감독.

TV드라마 <오늘밤만의 유희> (3화 시리즈) 시나리오 집필. 영화 <바카야로! 3 이상한 녀석들> 개봉.

2월 8일 <맛있는 결혼> 크랭크인.

테마, 주연배우, 타이틀까지 제작사가 정한 조건 아래에서 오리지널 각본을 쓰는 ‘시련’을 경험한다.

모리타는 “입에 착착 감기는, 웰메이드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오락영화를 만들자”라고 했다.

의도한 대로 이 영화는 호평을 받았고 흥행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5월 18일 <맛있는 결혼> 개봉.

1990

1991 

1992

3월에 경마 에세이집 『경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출판.

8월 29일 <미래의 추억 Last Christmas> 개봉. 후지코 F. 후지오와 공동 기획으로 ‘일탈적이면서도 현실을 되짚어 보는

이야기’를 목표로 한 것이 <미래의 추억 Last Christmas>다.

이후 모리타는 수 년간 ‘길고 답답한 여름 휴가’를 보낸다.

“흥행을 노리는 게 좋을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을지… 방향성을 잃어 버렸다.”

모리타는 감독이 되기 전 영화관에서 일한 적이 있고 흥행에 실패했을 때 관계자들이 겪는 불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한 고민이기도 했으며,

모리타는 누구보다도 영화 홍보 캠페인에 힘을 쏟은 감독이었다.

1993

1994

1995

TV드라마 <뵙게 되어 반가워요> 시나리오 집필.

전국의 지방 경마장을 돌며 쓴 에세이 「말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를 주간잡지 신초(新潮)에 연재.

이후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과 간다 여행/온천/경마』(아리아도네 기획)로 발행.

<(하루)>의 각본을 쓰기 시작한다. 원고지가 아니라 처음으로 컴퓨터(PC)를 사용한다.

모리타는 “일찍부터 컴퓨터를 사용했기 때문에 PC통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새로운 소통

수단으로 원거리에서 문자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싶었다”라고 한다.

‘윈도우 95’가 출시되기 1년 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컴퓨터를 다루지 않던 시대였다.

4월 7일 <(하루)> 크랭크인.

인물 촬영과 병행해 컴퓨터 화면의 문자를 촬영했으나 스태프 중 누구도 경험이 없었다.

모리타는 “읽기 편한 수준이 될 때까지 랩에서 몇 번이고 실험을 거듭했다”라고 한다.

당시에는 필름 시대였기 때문에 ‘필름 레코딩’ 방법으로 수 개월에 걸쳐 제작되었다.

3월 15일 <(하루)> 개봉.

PC 메일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4년 만의 모리타 작품으로 ‘모리타 부활’이라 불리며 큰 화제를 모았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모리타는 “흥행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 자신의 재산으로서 굉장히 보람이 있었다. <(하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7년 뒤에 밝히고 있다.  

 

일본중앙경마회(JRA)의 연간 TV광고 시리즈 감독.

후반은 <실락원> 촬영으로 하차한다.

 

12월 10일 <실락원> 크랭크인.

인기를 누렸던 신문연재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모리타는 여성이 즐길

수 있는 포르노 영화로서 성공 가능성을 직감하고 제안을 받자마자

“하겠습니다!”고 즉답했다.

더욱이 순수한 사랑을 그린 <(하루)>에서 중독적인 사랑으로의 전환은

<소레카라>와 <소로반주쿠>에 필적한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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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1998

1999

5월 10일 <실락원> 개봉.

모리타의 예상대로 여성 관객에게 지지를 받으며 크게 흥행한다.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도 에이 극장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 행렬이 긴자잇초메까지

이어졌던 것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일본아카데미상 감독상 등 다수의 영화상을 수상하고 몬트리올세계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

  

  

5월 11일 <39 형법제39조> 크랭크인.

예전부터 서스펜스를 매우 좋아했던 모리타는 ‘한 컷, 한 컷, 그림 자체가 서스펜스여야

한다’며 오오모리 스미오의 오리지널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다.

 

5월 1일 <39 형법제39조> 개봉.

모리타는 법률 문제를 제기하며 파문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자신에게는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한다. 영화계의 평가도 높을 뿐만 아니라

감독과 스태프, 출연진 모두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출품.

 

7월 15일 <검은 집> 크랭크인.

모리타는 “소설 원작과 비슷한 실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적인 만듦새보다 ‘발랄한’ 호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검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고 노란 해바라기나 파란 하늘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감각도 있지 않을까”라고 이 영화의 출발점을 말한다.

11월 13일 <검은 집> 개봉.

특히 젊은 관객에게 호응을 얻는다. 영화를 보고 ‘잔업이 무섭다’라는 사람이 속출했다.

최근(2022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2002

1월 25일 <모방범> 크랭크인. 3월 15일 크랭크업.

원작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가 모리타를 감독으로 지명했고, 모리타는 영화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 한다.

원작자인 미야베 미유키가 모리타를 감독으로 지명했다. 모리타는 영화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작을 읽으면서 점점 더 많은 이미지가 떠올랐고 좋은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버라이어티 쇼 출연자를 다수 섭외한 이유는 버라이어티적인 양상으로 범죄의 관념을 영상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한 명도, 천 명도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이 원작에서 그것을 느꼈다”, “악의 선택을 받은 피스(나카이 마사히로 역)도 한 인간인 것이다. 정말 몇 번을 봐도 나에게는 철학적인 영화로 느껴진다. 언젠가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6월 8일 <모방범> 개봉.

원작과 다른 결말로 찬반양론을 일으키며 그해 실사 영화 중 박스오피스 1위가 되었다.

2003

1월 <괭이갈매기> 시나리오 헌팅.

4월 15일 <아수라처럼> 크랭크인.

모리타가 젊은 시절부터 열렬한 팬이었던 드라마 각본가 무코다 구니코의 TV드라마를 영화화 한 작품이다. ‘모리타 사단’의 역대 주연 여배우를 비롯해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모리타는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영화는 일본 영화의 ‘스시’다. 내가 일류 스시 장인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감독을 맡았다. 억지로 꾸미기 보다는 원재료의 장점을 드러내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장기를 살리는 것이다. 게다가 현미경으로 보듯이 인간을 보면 실제 크기보다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TV판이 방영된 1979년 무렵에는 ‘인간에게는 아수라(阿修羅)가 있다’는 발견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모두가 아수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방법, 긍정적으로 사는 방법은 없는지, 그것을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데뷔작 <노 요우노모노>의 광고 문구처럼 이 영화는 ‘인간이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보여준다.

9월 24일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출연.

11월 8일 <아수라처럼> 개봉.

모리타는 “젊은이들이 보고, 웃고, 심지어 울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고 했다.

여성 관객에게 인기를 끌며 감독과 스태프, 출연진들이 고루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그해 몬트리올세계영화제 경쟁 부문 출품.

12월 키네마순보사에서 인터뷰 및 스태프 증언 등으로 이루어진

『모리타 요시미츠 팀』 간행.

 

2월 14일~26일 <괭이갈매기> 겨울 로케이션.

6월 14일~8월 13일 <괭이갈매기> 여름 로케이션&본 촬영.

모리타는 “디지털화 물결이 급속히 고조되며 인간의 행동 패턴이나 의식에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결국 CPU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이나 사랑, 미움은 이러한 시대에도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일본의 계절과 풍토를 충분히 보여주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테마를 탐구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한다.  

11월 13일 <괭이갈매기> 개봉.

2004

2005

7월 25일 <마미야 형제> 크랭크인. 9월 6일 크랭크업.

 

모리타는 홍보 관계자에게 짧은 수기 메모를 남기고 있다. 

‘<마미야 형제>는 사이 좋은 형제가 아니라 사이 좋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같은 취미를 갖거나 분위기가 비슷한 친구죠. 성별을 떠나 마음과 정신이 통하는 친구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파트너를 찾고 있어요. 이게 이 영화의 정체성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한다면 영화는 흥행할 것입니다. 홍보도 이 점을 감안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2006

5월 13일 <마미야 형제> 개봉.

 

‘작지만 행복이 가득’한 이 작품은 정보화 사회의 사람들에게 아날로그의 풍성함을 선사했다.

 

13개관에서 시작한 상영관은 점점 늘어나 ‘소규모 개봉에서 확대 개봉으로’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또한, 발매 후 1년이 지나도 비디오 대여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인기 작품이 된다.

9월 18일 <쓰바키 산주로> 크랭크인. 12월 1일 크랭크업.

 “존경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을 리메이크하게 되어 가슴이 벅찹니다. ‘세계의 구로사와’ 감독의 원천은 모든 기술과 연출력을 십분 활용하면서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존경하고 본받아 왔습니다. <쓰바키 산주로>는 현대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인간 드라마입니다. 시대극이라는 규정을 넘어 이 ‘인간 드라마’라는 부분을 중요시하고 싶고 지금 관객 분들이 어떻게 봐 주실지 도전과 동시에 역사적 의의도 느끼고 있습니다.” 모리타는 제작 발표회에서 영화에 임하는 결의와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2007

5월 26일 <남쪽으로 튀어> 크랭크인. 7월 18일 크랭크업.

모리타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을 둘러싼 기억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어딘가에 가본 적도 없다. 내 영화에 가족을 테마로 한 작품이 많은 것은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고장이나 맞는 사람이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자신이 있을 곳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이 이 영화를 찍은 가장 큰 이유다”

 

10월 6일 <남쪽으로 튀어> 개봉.

12월 1일 <쓰바키 산주로> 개봉.

2008

2009

2010

2011

11월 16일 <내가 낼게> 크랭크인. 12월 22일 크랭크업.

제작 발표에 임하며 모리타는 이렇게 말한다.

“돈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요즘 세상에서 돈을 쓰는 것, 그 목적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본다. 경제가 사람의 삶을 크게 좌우하고 있는 요즘 돈의 쓰임새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지금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필요하다 여겼다.”

“돈은 사람의 마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사람의 마음은 돈이 없어도 존재한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보다 살아난다고도 볼 수 있다.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믿었던 사람이나 믿었던 기업이 상대가 되지 않으면 마음(魂)이 움직이지 않는다. 리먼 쇼크도 관계자들이 마음(魂)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금융계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애정이 없는 증권에 돈을 걸었기 때문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만약 혼이 담긴 내기를 했더라면 나름대로 회복할 방법이 있었으리라 본다.”

10월 31일 <내가 낼게> 개봉.

12월 3일 <무사의 가계부> 크랭크인, 2010년 1월 26일 크랭크업.

처음으로 교토 쇼치쿠 촬영소에서 진행된다. 모리타는 미술, 의상, 결발(전통 헤어), 배우진 등 촬영소로서 교토가 가진 저력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느낀다. 그 발군의 팀워크에 “좀 더 빨리 교토에 올 걸 그랬다”고 통감한 모리타는 이후 교토 촬영 기획을 여러 개 준비한다.

모리타는 이 영화에 대해 “영화는 늘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하며 매번 다른 콘셉트로 찍고 싶다.

이번에는 ‘소로반 사무라이(주판을 특기로 하는 젊은 사무라이)’라는 발상이 매우 재미있게 여겨졌다.

어느 시대든 경제가 사회 근간이 되는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대극에서 다뤄지지 않았는지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무사 시대에 가계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고 상세한 가계부를 통해 가족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라고 한다.

7월 <이걸로 좋은 거야! 영화★아카쓰카 후지오>에 출연.

9월 1일 <우리들의 급행☆A열차로 가자> 크랭크인. 10월 19일 크랭크업.

모리타 팀에서는 크랭크업을 하면 반드시 뒤풀이를 가졌다.

이 영화의 뒤풀이 개최 소식은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규슈 로케이션에서 크랭크인(출발)한 이번 영화는 약 40일간 쉼없

이 달려 얼마 전 노조미지소 사장실에서 무사히 크랭크업(도착)하였습니다. 규슈에서 도쿄 근

교로 다시 도쿄로 다양한 기차와 열차를 갈아 타며 사고나 부상 없이 무사히 완주할 수 있

었던 것은 모리타 팀의 팀워크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연회를 열고자 하니 스태프, 출연진, 관계자 여러분,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규슈 촬영에서 스태프들에게 배부된 「규슈 로케이션 안내문」에는 이런 글이 있다.

‘각 로케이션 장소는 제작부에서 관리, 보호 등을 하지만 오염, 파손 등이 되지 않도록 서두

르더라도 뛰지 말고 안전하게 작업해 주세요’

12월 4일 <무사의 가계부> 개봉. 대흥행.

선행 로드쇼 첫날을 성황리에 마친 가나자와에서 모리타가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난 행복한 사람이야”다.

이후 빅히트 감사 인사 캠페인으로 각지를 순회한다.

홍보 캠페인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모리타의 마지막 행보가 되었다.

1월 18일 <우리들의 급행☆A열차로 가자> 초호 시사.

  

3월 22일 관계자 시사 개시.

<마미야 형제>에도 나오듯이 ‘이해 관계가 없고 속박되지 않으면서 공통의 취미를 가진

 친구가 현 시대에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 모리타의 콘셉트였다.

7월5일 주제가를 담당한 힙합 그룹 RIP SLYME에 대한 모리타의 코멘트.

“RIP의 음악은 가사가 리듬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에서 리듬이 파생되는 점이 훌륭하

다. 그래서 리듬을 타면서도 이미지가 잘 떠오른다. <마미야 형제> 때 처음으로 주제가를 부

탁했는데, 형제가 가진 묘한 긴장감,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함이 RIP의 음악과 딱 맞았다.

(중략)이번 영화 <우리들의 급행>에서도 처음부터 RIP에게 주제가를 부탁하고 싶었다. 두 주

인공이 사이 좋게 철도를 통해 우정을 쌓아가는 느낌이 RIP의 브로맨스적인 감각과 잘 어울

린다고 여겼다. (중략)리듬을 타는 느낌, 따뜻함,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가사, 바로 이거야! 이 곡을 테마로 남자든 여자든 모두 외로울 때는 우리들의 급행에 타길 바란다”

12월 20일 향년 61세, 모리타는 혼자 ‘우리들의 급행’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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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월 24일 <우리들의 급행☆A열차로 가자> 개봉.

1월 피아에서 『모리타 요시미츠 축제』 간행.

2013

2021 

9월 리틀모아에서 『모리타 요시미츠 전 영화』 간행.

12월 모리타 요시미츠 전작 ‘같은 것’ 블루레이 박스세트 발매.

열 개사 이상의 제작사가 협력하여 27편의 작품을 한 박스에 담은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실현되었다.

번역: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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